D#05 사임하던 날.

D#05 사임하던 날.
Photo by Sebastian Seck / Unsplash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오전 10시, 임시주주총회.

사실은 실제로 모이지 않는 주주총회였지만, 집에서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사무실로 나왔다.

총 일곱 곳의 투자사 중 여섯 곳은 동의서 공문을 미리 보내 주셨고, 이제 한 곳이 남았다. 텅 빈 회의실에 앉아서 애꿎은 이메일 받은편지함을 불안하게 새로고침 하다가, 죄인같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남은 한 투자사 담당자 분께 전화를 걸었다.

"저기...안녕하세요 팀장님. 혹시, 동의서 언제 보내주시나요?"

"아 오늘 내로는 보내드릴겁니다"

"혹시 비동의 공문 오는 것은 아니죠? 하핫....."

어색한 농담을 건네 보았지만, 사실 우리 둘은 지난 몇 주간 오늘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아쉬움 말, 오해하는 말, 혹은 원망하는 말로 가득찬 대화를 나눠왔기에 어색한 농담에 웃으며 답변하기에는 우리 둘 모두 지쳤다.

이미 지난 주말에 모든 개인 짐은 빼버렸고, 사무실에서 함께 했던 고양이 뚜비가 나를 사랑하는만큼 다 뜯어버린 너덜너덜해진 시디즈 의자에 앉아서 휘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언제든 방문하고 싶으면 방문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될 수 있다면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의자 뜯으며 스트레스 풀던 뚜비

자리에 앉아서 사임을 위한 등기에 필요한 서류가 잘 갖춰져있는지, 그리고 도장 날인 모두 문제가 없음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페이지콜에서 마지막 업무였다.

그리고선 어색하지만 우리는 문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선, 정식으로 인사하고 각자 자기의 길을 찾아서 흩어졌다.

페이지콜에서 마지막 퇴근이었다.


같은 날 오후 3시,

밖에 있으면 조금은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초여름 날씨였다. 나는 여의도 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의도는 사업하는 기간 내내 나에게 야망을 일깨우는 그런 장소였다. 특별히 여의도가 나에게 굴욕감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늘 여의도에 입성하고 싶었다. 여의도의 건물숲이 주는 오묘한 첨단 도시의 느낌과, 또 대조적인 한강과 여의도 공원이 주는 이질적인 자연의 느낌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뭔가 내 스스로, 혹은 팀 내에서 "우리 나중에 잘 되면 파크원으로 사무실가자!" 라고 이야기하며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잡았고, 개인적으로 주말에 시간이 남으면 파크원이 제일 잘 보이는 여의도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마치 '여리고성 돌기'같은 마음으로 파크원 주변을 휘-휘- 돌아다녔다.

국회의사당역에 내려서 여의도 공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대표님에게 카톡이 왔다. 그냥 일상적인 업무와 관련한 연락이었다.

사실은 오늘 임시주주총회에서 사임 동의서를 다 받으면 업무적으로 교류하던 분들에게 사임 안내를 일괄적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으로 모든 투자사에서 동의서를 받은 것은 아니어서 오늘 저녁이라도 동의가 다 완료되면 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사실상 대표로서 업무는 마무리 한 것은 맞기에 업무적으로 의사결정하여 답변을 드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오늘 대표에서 사임을 했노라고, 그리고 해당 내용은 앞으로 대표가 될 사람에게 잘 전달하겠노라고 답변을 보냈다.

애써 방긋 웃는 이모티콘을 넣으면서 아무렇지 않은척 메시지를 보냈는데, 차 한 잔 할 수 있느냐고 대신 답변이 왔다. 평소 같았으면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답변이 너무 어렵게 다가왔다.

'이제 나는 사람들이 왜 사임했냐고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 해야하지?'


사임 3주전, 5월 23일 목요일.

5월 31일로 예정되어있던 임시주주총회가 또 모든 투자사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여 다시 2주를 미루기로 했던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다. 때론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생각과, 또 가끔은 이렇게까지 내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 십번 씩 왔다갔다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IT업계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회사를 창업하고, 상장까지 시키신 후 사임하신 한 K대표님과의 식사 자리였다.

나는 본래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또 사임과 관련하여 내 마음이 너무 복잡하여 그냥 집에서 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크게 성공하신 분과 굳이 내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지 전혀 그려지지 않기도 했다. 그냥 좋은 말씀 하시겠지 뭐.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중에 내가 나중에라도 저런 경험이 있는 유명한 분과 일부러 식사 시간을 잡으려면 불가능에 가까운데, 경험삼아서 한 번 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선 어려운 마음을 잡고 약속 장소로 갔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음식을 주문했다.

나를 이 자리에 초대 해 준 또 C대표와 K대표님은 서로 여러 번 만난 사이로, 서로의 비즈니스 상황에 대해서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마지막 만났던 시간부터 오늘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로 간단히 업데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C대표는 나의 현 사임과 관련한 상황에 대해서 K대표님에게 간단히 소개를 했다.

K대표님의 창업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여서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사실 나는 K대표님이 사임한줄도 모르고 있었을만큼 사임과 관련한 뉴스나 과정은 거의 알려진바가 없었던차라 문득 선배 대표님은 그 과정이 어땠을까, 지금은 어떤 마음일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대표님. 제가 사임을 결정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정말 그 결정이 맞냐고 많이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는 직감으로는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분하게 그 결정이 옳은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단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은 빠르게 정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임하고나서 프랑스에 자전거를 타러 길게 나가게 됐어요. 그리고서 혼자서 장시간 자전거를 타면서 비로소 차분하게 내 마음 속에서 어렴풋이 알고있던 사임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하나 곱씹어보게 되었고, 확실하게 그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 때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person cycling on road distance with mountain during daytime
Photo by Urban Vintage / Unsplash

K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내 마음 속 깊숙하게 애써 외면했던 솔직한 내면의 생각들이 하나 둘씩 수면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생각들을 하나씩 펼쳐서 음미하고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도 직감으로는 내가 사임하는 것이 공동창업자에게도, 고객에게도, 투자사에게도 모두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왜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다.


6월 11일, 오후 4시 32분 여의도 공원

멍하니 파크원을 보며 앉아, 이런 저런 감정들을 다스렸다.

"대표님 결재 받았어요. 지금 날인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드디어 사임에 필요한 일곱 장의 동의서가 모두 모였다.

8년 8개월간의 플링크, 그리고 페이지콜에서 근무를 끝내고 퇴사하는 순간이었다.


2024년 9월,

사임, 그리고 100여일이 지났다.

나는 새로운 산업에서, 새로운 직무로, 새로운 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하고 바로 창업하는 바람에 30대를 대표님으로만 살아왔던 나에게, 대표가 아닌 지난 100일은 모든 것이 새로운 하루 하루였다. 나에 대해서 스스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남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나에 대한 앎에서 비롯된 자존감은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성숙함은 올해 1월부터 몰아치던 각 사건에 대해서 담담히 하나씩 펼쳐서 음미하고 정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창업가 출신으로서 스타트업에 소속되어서 일하면서 든 여러 생각들과 과거의 내 선택에 대한 평가들을 문득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다시 한 번 블로그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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